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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열의 體讀]민주주의 지도자는 '말'로 통치한다, 노무현이 그랬다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분 23초

돈줄과 목줄을 흔드는 방법이 아닌
토론과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
그는 말에 사상·철학이 담긴다고 말했다


[최대열의 體讀]민주주의 지도자는 '말'로 통치한다, 노무현이 그랬다 대통령의 말하기 / 윤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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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인터넷 검색사이트에서 '박근혜 화법'을 검색하면 조롱섞인 비판이 주를 이룬다. 68개 단어를 한 문장으로 얘기해 의미전달이 불가능하다거나 '혼(魂)의 비정상', '우주의 기운' 같은 표현을 공식석상에서 쓴 데 대해 적절치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특정 세대나 계층이 주로 의견을 피력하는 온라인 세상의 특성을 감안한다고 해도, 정치인 혹은 인간 박근혜를 지지하는 집단 역시 박 대통령을 달변(達辯)으로 치켜세우지 않는 점을 보면 그의 말하기 기술에 높은 점수를 주긴 어려울듯하다.

정치인 노무현이 세간의 이목을 끈 건 그의 '말발'이 한몫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면전에 두고 "시류에 순응한다는 게 힘 있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냐"고 따져물었던 초선의원 노무현에 사람들은 매료됐다.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합니까."(2002년 대통령 경선 당시 장인의 좌익경력에 대한 정치권 공방에 반박하며), "나는 신당에 반대한다."(2006년 대통령 재임시절 여당 내 신당창당 움직임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등 감성적이거나 때로는 담백하고 직접적인 표현은 긍정적인 맥락에서 회자된다.


최근 출간된 '대통령의 말하기'는 노무현의 화법을 파헤쳤다. 14대 국회의선 선거에서 낙선한 노무현이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를 펴낼 당시 집필에 참여했다 훗날 참여정부 대변인과 제1부속실장 등을 지내며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윤태영씨가 썼다. 제목이 함축하듯, 노무현에 대한 회고록이면서 동시에 말에 대한 저자 혹은 노무현의 접근방식을 다룬 실용서다. 여기에 하나 더, 지도자의 화법을 둘러싸고 최근 말이 많은 만큼 작금의 정치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정치사회서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출판사에선 일단 자기계발서로 분류했다.


다시 박근혜로 돌아가 얘기하자면, 그 역시 말의 힘을 적잖이 입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피습을 당한 후 병상에서 "대전은요?"라는 발언이 어떤 경로로 전해졌다. 부친 박정희의 암살 당시 했다는 발언(휴전선은 괜찮습니까)과 묘하게 오버랩돼 특유의 아우라를 더했다는 평을 들었다.


2012년 대선 당시 TV토론에 나와 당시 문재인ㆍ이정희 후보와 설전을 주고받았는데, 발언의 내용보다는 어떤 공격에도 꿋꿋이 버텨내는 태도가 지지자를 더욱 응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무현 역시 재임시절 크고 작은 설화(舌禍)에 시달렸던 점을 보면 정치인은 말로 살고 말로 죽는다는 표현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듯 보인다. 물론 그게 국정 최고 자리에 있는 이라면 파급력은 몇 곱절이 된다.


盧대통령 재임시절 대변인 지낸 저자
다양한 사례로 지도자의 화법 파헤쳐
작금의 정치현실 우회적 비판하기도


윤태영씨가 본 노무현은 '말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를 통해 정갈히 정리하는 한편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실을 바로잡고 구성을 정교하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사석에서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은 노무현의 말에 대한 철학이 잘 묻어난다. "말은 한 사람이 지닌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빈곤하면 말도 빈곤하다. 결국 말은 지적능력의 표현이다."(저자 서문 중)


언뜻 단순해 보이거나 즉흥적으로 나온 말들도, 찬찬이 뜯어보면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일 때가 많았다. 노무현의 옆에서 10년을 보낸 윤씨가 내린 결론이다. 특히 청와대에서 일한 2003년부터 2007년까지는 말을 그대로 받아적고 정리해 때로는 외부에 발표하는 일까지 맡았으니, 어지간한 이보다는 대통령의 말을 많이 곱씹었을 테다. 그는 이번 책을 정리하면서 노무현의 말을 기록했던 업무노트 100여권과 포켓수첩 500여권, 한글파일 1400여개를 참고했다고 한다.


책의 전체적인 얼개는 노무현의 화법이 가졌던 기본적인 원칙을 다섯 가지로 구분한 뒤 각 원칙별로 구체적인 팁을 전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과거 공식석상에서 했던 발언이나 연설, 사석이나 비공개로 이뤄진 모임에서 했던 말을 끄집어내 전달하고 있어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도 담았다. 2006년 12월, 사임과 임기단축에 관해 노무현이 직접 언급한 적이 많았을 당시 어느 순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때 일화가 있다. 개헌과 대통령 임기단축에 관한 논의가 한창 불거졌을 때인데, 당시 참모진들의 만류에도 노무현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가 이창동, 문성근, 박재동, 황지우씨 등과 저녁식사 자리를 만들어 대통령을 초대해 설득하면서 돌아섰다고 한다.


윤씨는 당시 노무현이 꺼냈던 사임과 임기단축이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노무현은) 고심의 내용을 담백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면서 "쉽지 않았던 20년 정치역정 가운데서도 최대의 시련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남은 임기 1년을 내놓고 이를 개헌이라는 정치발전의 매개로 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다.


대통령 재임시절 딱 한번 외부에 발표할 입장을 직접 메모로 적어 대변인에게 읽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역시 2006년 하반기, 청와대와 여당이 삐걱거리면서 신당창당 움직임이 있을 때였다. 원문은 이렇다. "나는 신당을 반대한다. 신당은 지역당을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적을 유지하는 것이 당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탈당을 하는 것이 당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중략) 나는 열린우리당을 지킬 것이다. 이만한 정치 발전도 소중한 자산이다."


그는 대변인에게 메모를 건네며 문장 하나, 낱말 하나 바꾸지 말고 그대로 발표하라는 지시도 덧붙였다. 10여년 전, 기사를 통해 이 같은 입장을 전해들었을 당시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배경을 알고 되짚어보니, 한국 현대정치사에서도 흔치 않은 문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자가 조직을 휘어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줄과 목줄을 흔드는 것일 테다. 가급적 빠른 시간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다면 말이다. 우리가 현재 보고 듣고 직접 겪기도 하는 일이다. 노무현은 민주주의 사회의 통치수단은 '말'이라 여겼다.


독재자가 힘으로 통치한다면 민주주의의 지도자는 열린 마당에서 대화와 토론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얘기다. 그는 "국가 지도자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라며 "가치와 전략, 철학이 담긴 말을 쓸 줄 알아야 지도자가 되는 법"이라고 했다. 책 서문에 있는 노무현의 말에 대한 단상은 그래서 여운이 짙다.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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