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궁금증]태릉의 여자와 정릉의 남자는 왜 함께 눕지 못했나

문정왕후와 중종임금이 제각각 묻혀 독수공방하는 까닭

최종수정 2017.04.20 11:04기사입력 2017.04.20 11:04 이상국 디지털뉴스본부 기자
중종임금에게는 3명의 아내가 있었다.

첫째는 1506년 반정으로 즉위한 뒤 7일만에 폐위당한 단경왕후 신씨다. 그녀는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쫓겨나는데, 북한산 치마바위 전설의 주인공이다. 중종이 자신을 그리워한다는 소문을 듣자 궁궐에서 볼 수 있는 바위에 치마를 펼쳐놓아 위로했다는 갸륵한 여인이다. 둘째는 장경왕후 윤씨이며 셋째는 성정이 워낙 강해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정왕후 윤씨(1501-1565, 명종의 어머니)다.

중종을 모신 삼성동 정릉.


그런데 중종과 세 여인은 모두 각각 다른 곳에 묻혀 있다. 중종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정릉(靖陵)에, 단경왕후(폐위 233년만에 영조때 복위)는 고양 장흥 부근의 온릉(溫陵)에, 장경왕후는 고양 서삼릉에 있는 희릉(禧陵), 문정왕후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泰陵)에 안장됐다. 어쩌다 이들 부부는 죽어서 모두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됐을까.
1515년 장경왕후가 승하했을 때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태종왕릉) 옆에다 능을 썼다. 그때 당시 권신이던 김안로가 정적이었던 정광필을 제거하기 위해, 정광필이 조성을 주도했던 무덤에 대해 위치가 좋지 않다며 트집을 잡는다. 1537년 장경왕후의 능은 22년만에 고양 서삼릉 자리(희릉)로 이사를 가게 된다. 7년 뒤인 1544년 중종이 승하했을 때 왕의 뜻에 따라 희릉에 모신다. 왕후 옆에 언덕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능을 썼다.

드라마 '여인천하'의 문정왕후 역을 맡았던 전인화.

다시 15년이 흐른 1559년 중종의 능침이 풍수적으로 불길하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이런 의견을 낸 사람은 문정왕후였다. 왜 그랬을까. 그녀는 중종이 다른 아내와 묻혀 있는 것이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자신이 죽으면 왕과 나란히 묻혀야 하는데, 그러려면 옆자리가 비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녀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1562년 중종릉은 서울 삼성동으로 옮겨진다.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

문정왕후가 세상을 떴다. 그녀는 '무사히' 중종 옆에 묻힐 수 있었을까. 그런데 삼성동 정릉 자리 부근에 물이 많아 능을 더 쓰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예 다른 곳으로 중종릉을 옮겨와 함께 쓰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왕릉을 여러 번 옮기는 건 좋지 않다는 반론이 있어 그러지도 못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혼자 태릉에 눕게 된다. 중종은 세 부인과 떨어지는 독수공방 속에서 물난리도 자주 겪었고 임진왜란 때는 능이 파헤쳐지는 수모까지 겪는다. 죽어서까지 왕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한 아내의 비원이 결국 이뤄지지 못한 채, 태릉은 마음의 꼿발을 돋워 멀리 삼성동 쪽을 바라다보고 있는지 모른다.

디지털뉴스본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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