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클도 아는 우리의 주적? …주적 논쟁, 1992년 노태우정권 때도 있었다

[낱말의습격]대선정국 대통령 자격 논쟁으로 번지는, 낱말 하나의 뉘앙스

최종수정 2017.04.22 04:02기사입력 2017.04.21 10:56 이상국 디지털뉴스본부 기자





▶ 주적이란 말이 언론에 등장한 건 1992년

주적(主敵)이란 표현이 국방백서(국방부에서 발행하는 연례보고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5년이다. 그 전해인 1994년 3월 북핵문제로 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판문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북측 대표 박영수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한 뒤 국민들의 대북감정이 극도로 악화됐다. 안보에 대한 문제의식도 커져, 이듬해 국방백서에서 처음으로 '주적인 북한'이란 문구를 넣었다.

그런데 확인 결과 '주적'이라는 말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 1월 28일이었다. 이날 동아일보는 1면 톱기사로 '국방부가 '주적'개념을 주변 열강으로 전환하는 통일대비 중장기 신국방정책을 마련했다'고 보도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대북방위를 중시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상군 위주에서 해군과 공군의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의 큰 틀을 바꾸고 있다는 논지였다. 이 보도 이후 국방부가 손사래를 쳤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 연두순시 때 국방부가 보고할 내용에는 그런 것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이튿날 정정보도를 실었지만, '기자의 눈'칼럼(김재홍기자)을 통해 국방부가 국민에게 설득력 있는 국방정책을 세워야 할 때, 파문을 걱정해 주변 열강의 눈치를 보는 보신주의적 태도를 보인다고 꼬집고 있다.
당시 주적 문제가 나오게 된 까닭은,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붕괴되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대북 화해불가침 합의서 마련 등의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대통령 업무보고 내용에 주적 개념 재설정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이날 통일에 대비한 국방정책의 정비를 지시했다.



▶ 국방부가 주적이라고 규정하는 건 선전포고?

동아일보 기사가 나간 뒤 국방부에서는 '주적'이란 용어에 경악했다고 한다. 한 간부(당시 국방부 정책실장 김재창 중장)는 "국방부가 주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육군본부의 다른 대령은 "군사훈련에서 공격목표를 뜻하는 주공(主攻)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주적이란 말은 처음 들어본다"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또다른 국방부 간부(당시 국방부 교육정훈국장 양상태소장)는 "주변 열강을 모두 적으로 돌렸으니 우선 일본이 가만 있겠느냐"며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방부가 화들짝 놀랐던 것처럼 주적개념이 진짜 선전포고와 같은 것일까. 주적은 '제1의 가상적(假想敵)'을 표현하는 의미일 뿐이라고 안보 관련 전문가들은 말한다. 가상적을 전제하지 않는 국방안보정책은 사실 있을 수 없다. 미국과 일본도 가상적 제1과 제2, 혹은 제3까지 상정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 북한을 제외한 공산주의 국가는 주적보다 위협수준이 한단계 낮다는 의미로 '적성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핑클 이진 이효리 옥주현 성유리 / 이효리 팬페이지 옥주현 소속사 페이스북

▶ 가수 핑클도 아는, 우리의 주적

국방백서 속의 '주적'이란 말은 2000년 버전까지 남아있었다. 1999년 1월에는 인기그룹 가수 핑클이 나오는, '북한의 우리의 주적' 만화책이 국방부에서 발간되기도 했다.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라는 건 핑클도 안다는 것이다. 그해 11월 국정원에서 낸 탈북자 증언집에서는 "북한 주민들이 남한을 주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소개됐다.

국방부가 발간한 만화책자 '핑클도 아는 국군의 주적'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 주적론이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2002년 12월 국방백서 대신 1998-2002 국방정책이 발간됐는데, 이 책자부터는 대북 주적 표현이 사라졌다. 국방부는 2005년 국방백서에서 '주적'이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주적은 아니지만 '직접적이고 가장 주요한 위협'으로 규정했다.

▶ 대선판에 들어온 안보프레임

오늘자 조간들은 대선판을 새롭게 달구고 있는 '주적 논쟁'을 주요기사로 다뤘다. 지난 19일의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불거진 논란이 이튿날 정치적 공방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일 토론에서 유승민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향해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냐"를 캐물었고, 문후보는 "그런 규정은 대통령이 될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라고 질문의 즉답을 피해 갔다. 이에 대해 안철수 후보가 이튿날 "국방백서에 주적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남북 대치 국면에서 북한은 주적"이라고 문후보의 안보관을 문제삼았다. 유승민 후보도 나서서 "주적을 주적이라 부르지 못하는 후보를 과연 대통령으로 뽑아서 되겠느냐"고 힐난한다. 문후보는 "남북관계가 개선된 후 국방백서에서 주적 규정은 빠졌다"고 말하고 "북한은 지금 군사적으로는 우리하고 대치하고 있고 또 위협이 되는 적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함께 평화통일을 해내야할 대상"이라고 밝힌다.

'주적 논쟁'을 다룬 2017년 4월21일자 신문.

이 기사를 비중있게 다룬 조간의 제목들을 보자.

대선판에 떠오른 '주적' 논란 - 조선일보
안보 우클릭 경쟁 너무 나갔다 - 경향신문
국방백서에 '주적' 없는데...또 색깔론 대선판 - 한겨레
해묵은 주적 논쟁, 옆길 새는 대선판 - 한국일보

▶ 주적이라 말하는 것과 굳이 말하지 않는 것

조선일보의 경우, 문재인 후보의 '주적 언급 회피'에 대한 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의 반박을 비중있게 다루면서 상당히 의미를 부여하는 기사를 쓰고 있다. 한국일보는 정책 대결에서 벗어나 옆길로 새는 대선판을 꼬집고, 한겨레는 국방백서에 '주적'이란 표현이 없다는 걸 헤드라인에 올려 문재인 후보의 입장에 힘을 실었다. 경향은 안철수 후보가 안보 우클릭으로 그쪽 표를 흡수하기 위해,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조선을 제외한 3개의 신문은 대선 후보 구도가 안보프레임 속에 들어가버리는 상황을 경계한다.

트럼프대통령이 대북 선제타격을 마지막 시나리오에 넣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인데다 이 땅의 주류였던 보수 진영의 권위와 파워가 거의 궤멸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북 문제와 관련한 대통령의 입장은 매우 예민한 문제인 건 틀림없다. 그러나, 주적은 선전포고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군이 제1의 가상적으로 삼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대화 상대이기도 한 북한을, 굳이 지도자의 '안보의식 테스트 문제'로 끌어들이는 수법은 이미 21세기 접어들면서 폐기된 '낡은 적폐'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핑클도 아는 주적'을 문재인 후보가 모를 리 없다. 다만 그걸 대통령 후보가 입 밖에 내서 구체화하는 순간, 향후 많은 협상이나 정책적 선택의 가능성이 막혀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디지털뉴스본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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