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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美·中외교 균형점 찾아낼 광해다운 대통령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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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美·中외교 균형점 찾아낼 광해다운 대통령 기대한다 조영신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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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영신 기자]1636년12월1일. 후금(청)의 12만명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말그대로 파죽지세였다. 12만 대군은 10여일 만에 한양까지 밀고 내려왔다. 청 대군은 한양까지 오는 길에 공성전을 하지 않았다. 주요 거점의 성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조선의 왕 인조였다. 인조만 잡으면 전쟁은 쉽게 끝난다는 것을 경험(정묘호란)상 잘 알고 있었다.


오랑캐의 갑작스런 침범에 조선은 우왕좌왕했다. 인조는 부랴부랴 도성을 나와 강화도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후금 군사들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한 상태.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조와 조선군은 남한산성에서 항쟁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조선은 청에 항복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로 청 태종에게 3번 큰 절을 한 뒤 9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를 해야만 했다. 굴욕적인 이 전쟁을 우리는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병자호란은 급변하는 대외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일어난 전쟁이다.


반정을 통해 왕이 된 인조는 조정에 남아 있는 광해의 그림자를 지울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북방정책에 대해서는 강경했다. 인조는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내세웠다. 수명을 다해가는 명나라를 추종한 반면 신생 후금은 무시한 것이다. 명에 대한 의리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조정 상황을 보면 순수한 의리로 명을 지지한 것만은 아니다. 당시 조선은 붕당정치로 몸살을 앓았다. 사림세력은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리, 정치색을 달리했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이후 북인이 정치 주도권을 잡았다. 북인이 옹립한 왕이 바로 광해다. 강홍립 항복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광해는 주변정세를 살피고 불필요한 싸움을 피했다.


광해의 정책(명과 청사이의 중립외교)은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과 남인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광해 역시 패륜이라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들은 이를 명분으로 능양군(인조)과의 모반을 도모했다.


반정은 성공했다. 하룻밤새 왕이 바뀐 것이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와 서인 및 남인이 광해와 북인의 대북정책을 따를 리가 없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후금을 무시했다. 친명배금 정책은 패착이었다. 청은 말그대로 떠오르는 태양이었다면 명은 지는 해였다. 명은 1644년 멸망했다. 인조와 당시 권력을 쥔 조정세력이 대외 정세를 조금만 더 관심있게 봤다면, 삼전도와 같은 굴욕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를 놓고 중국과 미국이 신경전을 펴고 있다. 중국은 한국에 치졸한 보복을 하고 있다.


미국 역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지난주 일본과 한국, 중국을 차례로 방문한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일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라고 했다. 한국 정권 교체 후 사드 배치에 대한 결정이 바뀌면 안된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경고다. 한국의 우방국이라고 자청한 미국 역시 졸렬하기 매한가지다. 한국의 안보를 위해 사드를 배치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중국과 미국중 어느 쪽이 떠오르는 태양인 지, 어느 쪽이 지는 해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는다는 것이다.


사드 배치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금와서 물리는 것도 우습다. 5월9일 인조스러운 대통령보다 광해다운 대통령이 선출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조영신 기자 as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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