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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돼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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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돼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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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지금도 대한민국 군대에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돼지 당번'이란 게 있었다. 아침 기상부터 저녁 취침까지 돼지를 돌보는 임무인데 워낙 은밀해서 국방부 직제에도 나와 있지 않고 적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설령 적들이 알아챘더라도 딱히 어쩔 수 없는 것이, 돼지에게 밥 주고 산책시키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돼지 당번은 부대의 사기 진작에 기여해 궁극적으로는 군사력을 증강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승 - 오래 전 강원도 양구에서 군생활을 하던 어느 가을날, 그러니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시무시한 상병 시절. 체육대회를 앞두고 동네 주민들이 돼지 새끼 한 마리를 부대에 기증했다. 살 찌워서 체육대회 성찬으로 쓰라면서. 문제는 누가 돼지 당번을 맡을 것인가였다. 돼지 당번에게는 부대의 모든 사역과 일과에서 제외되는 특혜가 주어지는 바, 군기가 번득여야 하는 졸병에게는 과분하고 '오대장성'이라는 병장에게는 초라한 일이었다. 따라서 상병이 마땅히 해야 한다는 고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날부터 돼지와 동거동락을 시작했다. 밥 달라고 꽥꽥, 놀아달라고 꽥꽥거리는 녀석을 어르고 달래느라 군화 바닥이 닳아가는 사이 국방부 시계는 흐르고 흘러 마침내 체육대회 아침.


전 - 그날 아침, 돼지 당번의 마지막 임무 수행의 순간이 다가왔다. 해머를 쥐긴 했지만, 석별의 정을 이기지 못해서였는지 살생의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몇번이나 정수리가 아닌 곳을 겨우 두드렸고 그 때마다 꽥꽥 소리만 요란했다. 그 꼴을 보다못한 선임하사가 결국 나서서 한방에 끝장을 내고서야 소란은 겨우 마무리됐다. 그 사이 체육대회는 무르 익어갔으므로 서둘러 살과 뼈와 내장을 발라내 삶고 찌고 끓이느라 분주했던 기억이 가을이면 불현듯 뜬금없이 떠오르곤 한다.

돼지 - 어느 설문조사를 보니 우리 국민들이 선호하는 육류는 돼지고기(43.5%), 한우(35.4%), 닭고기(9.9%) 순이었다. 소비자들이 육류를 구매할 때 '가격'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한우와 돼지고기 순위가 역전됐다는데 그러고보면 '네 돈으로 먹는' 소고기보다는 '내 돈으로 먹는' 돼지고기가 서민음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누추했던 이중섭의 삶을 다룬 <소설 이중섭>에서 "돼지고기 서근을 볶아놓자 오랜만에 풍성한 잔치가 되었다"는 내용도 그렇고, 성석제의 <투명인간>에서 "돼지고기 안 좋아하면 조선사람 아니다"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돼지고기는 어쩐지 서민의 삶과 애환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등심, 안창살, 살치살처럼 부위가 부각되는 소고기와 달리 삼겹살, 제육복음, 장조림처럼 요리로 대변되는 것이 희로애락을 양념처럼 버무리는 서민들의 삶을 닮았다. 때마침 돼지 고기가 다이어트에 탁월하다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요법(LCHFㆍ밥은 덜 먹고 고기를 많이 먹는 다이어트)'이 유행하고 있으니, 찬 바람 살랑거리는 오늘 저녁에는 삼겹살이나 한 볼테기 해야겠다. 그때 잡아먹은 돼지의 명복을 빌면서.


이정일 산업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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