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성폭력 피해자 "여자 상담사와 상담하라고요?"
최종수정 2018.03.13 15:32기사입력 2018.03.13 11:38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남성 성폭력 피해자들이 늘고 있으나 시스템 미비로 그들이 미투(#MeTooㆍ나도 당했다)를 외칠 곳은 마땅치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 사는 대학생 A(26)씨는 지난해 지인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지인 여러 명과 함께 술자리를 갖고 한 남자 선배의 집에서 잠이 들었는데 선배가 갑자기 자고 있던 A씨에게 다가와 강제로 입맞춤을 한 것이다. A씨는 사건 발생 다음 날 가해자에게 문자를 보냈고, 가해자로부터 전화로 사과를 받았지만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수도권의 한 대학에 다니는 B(24)씨도 지난해 비슷한 일을 겪었다. 교수와 함께 간 노래방에서 교수가 B씨의 허벅지와 성기 부분을 만지는 등 강제로 추행했다. B씨는 용기를 내어 학교에 신고했으나 가해 교수의 간단한 사과만 받았을 뿐 학교 측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이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후 같은 교수에게 한 차례 더 성추행 피해를 입어야 했다.

13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말 낸 ‘2017 성폭력ㆍ가정폭력 남성 피해자 지원현황 및 정책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강간, 유사강간, 강제추행 등 성폭력을 당한 남성은 2014년 1066명, 2015년 1243명, 2016년 1212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성폭력 발생 건수 중 5%대 비중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아동ㆍ청소년뿐 아니라 성인 남성 피해도 상당하다. 2016년의 경우 전체 피해자 중 60.4%가 만 20세 이상 성인이었다.

남성들이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받기 어려운 구조다.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의 대다수(95%)가 여성이기 때문에 신고ㆍ상담소 및 지원 서비스가 여성 중심으로 운영된다. 특히 상담을 진행하는 상담사들이 거의 대부분 여성이다.
이렇다보니 남성 피해자가 상담소를 찾으면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남성 피해자들은 여성에게 상담 받기를 거부하거나 “여성 이용자가 많은 기관 방문이 꺼려진다”고 했다. 청소년 남학생의 경우에도 여성이 진행하는 상담을 원치 않고 증거를 채취할 때 남성 상담사를 찾는 일이 잦다.

반대로 여성 상담사들은 “남성 피해자가 상담소에 내방했을 때 신변의 두려움을 느낀다”고 전했다. 남성 피해자가 여성 혐오감을 갖고 있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성 피해자들이 상담소의 문을 두드리는 건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한국성폭력상담소, 해바라기센터, 여성긴급전화 1366, 대학상담소 등에서 일하는 상담사 197명(남성 5ㆍ여성 192)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2.6%가 “성인 남성 피해자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상담 내용(중복응답)은 성희롱이 38.5%, 성폭력 59.4%, 가정폭력 72.0% 등이었다.

직장 내에 설치된 상담소를 찾는 남성도 상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12일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30인 이상 사업체에 종사하는 만 20∼50세 미만 노동자 중 사내 상담창구가 있는 1135명을 대상으로 한 직장 내 근무환경 실태 조사에 따르면 남성 665명 중 성희롱 관련 상담 경험이 있는 응답자가 13.1%로 나타났다. 여성(480명)의 성희롱 상담 경험 비율인 17.5%과 불과 4.4%포인트 차이다.

전문가들은 남성 상담사를 양성하고, 남성 피해자 전문 상담 기관을 설치할 것을 주문했다. 이미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남성 피해자들이 툭 터놓고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있도록 남성 상담사를 늘려야 한다”면서 “나아가 남성 전문 상담 기관을 설치할 필요도 있다”고 제안했다. 이 연구위원은 또 “남성 피해 사례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례집을 만들거나 지원 방법을 공유하기 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민영 기자 my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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