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경쟁은 나의 힘]신라면 VS 삼양라면…수십년간의 혈투史

수정 2016.02.29 07:00입력 2016.02.29 06:15

라면시장 열었던 삼양, 농심에 1위 자리 내줘

[경쟁은 나의 힘]신라면 VS 삼양라면…수십년간의 혈투史 ▲삼양라면 초기 제품 사진
AD

[아시아경제 김재연 기자] 앞으로 수십년 내 펩시콜라가 코카콜라를 이길 가능성이 있을까? 이 질문을 듣고 그럴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위 업체 제품에 길들여 진 소비자들의 기호가 쉽사리 변하지 않을 뿐더러 구축된 브랜드 이미지를 2위 업체가 넘기도 어려워서다.


그러나 한국 라면 시장에서는 펩시콜라가 코카콜라를 역전한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 2위 업체였던 농심은 농심라면·신라면을 연속 히트시키며 업계 판도를 바꿨다. 반대로 비운의 삼양라면은 후발업체들의 도전과 각종 악재 속에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콜라와 같이 입맛이 길들여 져 있는 라면의 순위가 뒤바뀌기는 쉽지 않다. 단순히 식품 업계의 경쟁을 넘어 격변의 한국 산업사를 보여주는 두 업체의 대표 상품의 쟁투를 다뤄 봤다.

◆기업가의 마음과 정부의 보조가 만든 '삼양라면' ='한국식 라면'에 대한 구상은 1960년대 남대문시장에서 시작됐다.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꿀꿀이 죽'을 사 먹기 위해 장사진을 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일본에서 본 라면을 떠올렸다.


라면이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한 그는 일본 명성식품으로 부터 기계와 기술을 도입, 1963년 삼양라면을 만들었다. 당시 가격은 10원.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20~3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고급음식이었다.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이름도 생소해 초기에는 인기가 없었다. 국내 소비자들은 라면을 '나면(羅綿)'으로 생각해 옷감 종류로 생각했다 한다. 당시 쌀·보리를 먹던 가계들은 밀가루 제품에 관심도 없었다. 삼양식품은 1년간이나 무료시식회를 하면서 제품 홍보에 나섰다.


재고만 쌓이던 삼양라면을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만든 건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이었다. 당시 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밀가루의 소비를 진작시키는 동시에 저곡가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식당에서는 수요일과 토요일 라면과 같은 분식만 팔아야 했다. 1965년 혼분식 장려 정책으로 삼양라면은 판매 시작 2년 만에 월 100만개가 팔려나가는 인기 제품이 된다.

[경쟁은 나의 힘]신라면 VS 삼양라면…수십년간의 혈투史 ▲신라면 조리컷

◆지금의 농심을 만든 '농심라면'과 '신라면'=''롯데 치킨 라면'은 최신시설과 기술로 만들어진 영양이 풍부한 우수한 식품으로 여러분의 식생활 개선과 구미에 알맞는 인스탄트(인스턴트) 영양 식품입니다'


196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 3면 하단에는 이 같은 광고문구가 나온다 . 당시 농심의 전신이었던 롯데공업은 첫 제품 '롯데라면' 출시로 분식 열풍에 올라탔다. 롯데공업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동생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이 라면 사업을 하기 위해 사채를 끌어다 만든 식품 업체였다.


출시 후 삼양라면에 밀려 2위 업체에 머물고 있던 롯데공업은 1975년 농심라면을 히트시킨다. 농심라면의 인기에 따라 1978년에는 아예 사명도 농심으로 바꿨다. 농심라면과 육개장사발면(1982년)·안성탕면(1983년)·짜파게티(1984년)의 연속 히트로 농심은 1985년 삼양을 제치고 라면시장 1위에 등극한다.


현재 라면 시장 부동의 1위인 신라면은 1986년에야 출시된다. 내부 시식회에서 너무 맵다는 반응이 나왔으나 신 회장은 매운 맛이 오히려 차별 요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제품 출시를 강행했다. 신라면은 출시 석달 동안 3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신기록 행진을 이어 갔다. 농심과 삼양과의 격차도 점점 벌어졌다.


◆'우지파동' 때문에 삼양라면시대가 저문 건 아니지만…=점점 신라면에 밀려 인기를 잃어가던 삼양라면은 '우지파동'으로 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검찰이 삼양식품이 면을 튀길 때 사용한 기름이 ‘공업용 우지(소 기름)’라며 수사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 우지는 정부의 권유로 20여년 이상 합법적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삼양라면의 이미지와 점유율은 떨어졌다. 반면 당시 팜유로 라면을 튀기던 신라면은 상대적으로 이득을 봤다.


결과적으로 삼양라면과 신라면의 대결구도가 우지파동 하나로 갈렸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미 1985년을 기점으로 소비자들의 기호는 신라면으로 기울고 있었다. 다만 사정기관의 엉터리 수사로 1위 업체와의 격차가 더욱 벌어진 점은 삼양식품 입장에선 아쉬운 점이다. 관행이었던 수입행위가 졸지에 위법행위가 되면서 당시 하청업체들도 파산했다.


◆입맛까지 만드는 정부…그래도 핵심은 '혁신'=신라면·삼양라면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주목할 부분 가운데 하나는 한국 산업사의 숨은 조정자들이 정치인·관료였다는 점이다. 라면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도 박정희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이 아니었다면 자리 잡을 수 없었을 지 모른다. 한국 라면 가공식의 시초인 삼양라면부터 기업인이 정부 관련 부처를 설득해 5만달러를 배당받아 만든 제품이었다. 다른 재벌들도 그렇듯 라면업계도 정부 정책을 통해 몸집을 키울 수 있었다.


혁신없이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 가운데 하나다. 1975년 당시 삼양라면의 시장점유율은 66.5%로 독과점 상태였다. 농심은 그러나 각종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시장점유율 격차를 줄여 나간다. 경기도 안성의 스프 공장을 세워 스프 맛을 끌어 올리면서 역전에 성공했다.




김재연 기자 ukebida@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오늘의 토픽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